“고객이 탄소배출량 물어”…수출 중소기업 ‘녹색전환’ 발등에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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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4.03.05. 오전 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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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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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생존 달린 기후위기 대응
지난달 28일 경기도 양평의 한 공장에서 5톤 트럭의 운전자가 이 공장에서 생산된 클린매트를 싣고 출발할 준비를 하고 있다. 이 기업은 거래처에서 운수용 트럭을 전기차로 바꾸라는 요구를 받았다. 양평/김영원 기자 forever@hani.co.kr

지난달 28일 경기도 양평의 ㄱ업체 공장. 산 밑에 자리잡아 ‘탄소’ 걱정은 없을 것 같은 이곳에선 최근 ‘탄소’ 걱정이 생겼다. 반도체 공장이나 병원·식당에 납품하는 클린매트(오염물질 흡착 매트)를 한달 평균 15만장을 만드는데, 이전에 해본 적 없는 탄소배출량 측정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탄소배출량을 측정하고 있냐고 묻더라고요. 처음엔 무슨 말인지 했어요.” 이 회사 김아무개 해외영업팀장 말이다. 김 팀장은 지난해 가을 미국의 한 거래업체 담당자와 한 화상 통화 때 느꼈던 당혹감을 털어놨다. 납품가 인하나 품질 이야기가 아니었다. 알이(RE)100을 이행하기로 했으니 ㄱ사도 지속가능 보고서 작성을 준비하라는 주문이었다. 이 보고서를 작성하려면 탄소배출량 등 환경 관련 지표가 필수다.

ㄱ사는 그해 봄에는 매트 운반차량인 5톤 트럭을 전기차로 바꿀 수 없느냐란 질문을 국내 거래처한테서 받았다. “1톤 전기차 트럭은 있지만 5톤 트럭은 전기차가 국내엔 없거든요. 아직도 이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고 있어요.” 연 매출 100억원에 직원은 23명밖에 안 되는 기업에는 벅찬 문제다. 이 같은 요구를 맞추지 못하면 국내는 물론 독일·미국 등 국외 기업으로 수출길이 막혀 1983㎡(600평) 규모의 작은 공장을 닫아야 할지도 모른다.

요구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석유에서 추출한 플라스틱 원료 성분의 하나인 ‘폴리에틸렌’과 아크릴(점착제용)이 주 성분인 매트에 대해서도 재활용플라스틱 원료 사용을 늘려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김 팀장은 고객사의 이런 요구가 부담스럽지만, 전 세계적으로 가지 않을 수 없는 길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는 “유럽 바이어들은 확고한 원칙이 있어보였어요. 지난해부터 요구받은 거니, 올해까지는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현재 우리의 고객사가 아니어도 수출하는 기업에게는 언제든 이런 요청이 올 수 있다고 생각해요.”

ㄱ사가 꼽는 경쟁사는 중국의 ㅁ매트사이다. 김 팀장은 넓은 땅, 우수한 재생에너지와 정보통신(IT) 기술 등을 갖춘 중국이 재생에너지 확대에 적극적으로 나선다는 뉴스를 볼 때마다 걱정이 된다고 했다. 중국에 재생에너지 보급이 잘 된다면, 한국 기업들보다 중국 기업이 더 고객사 확보에 유리하지 않을지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결국 ㄱ사는 공장과 창고동 인근 공터 부지에 태양광 발전 시설을 설치하려 컨설팅 지원 사업을 알아보고 있다.

“해외 고객사에서 원자력발전으로 생산한 전력을 인정하는 걸 본 적이 없어요. 지난해에는 도의 기업지원 사업에도 참여했는데 올해는 아직 안 보여요. 정부가 체계적으로 이 문제를 같이 대비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알이100이나 유럽연합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생산부터 유통·재활용까지 제품 생애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배출량을 평가하는 게 뼈대인 ‘환경 전 과정 평가’(LCA), 재활용 플라스틱을 일정 비율 이상 사용해야 하는 탈플라스틱 규제 등 ‘녹색 전환 제도’가 지구촌에 속속 등장하고 있다. 전세계 나라들이 기후위기 대응이라는 명분과 자국 산업 보호라는 산업정책을 융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새로운 무역 질서의 확산은 수출 중견·중소기업에 ‘녹색 장벽’으로 인식되고 있다. 기후위기 대응에 공감하면서도 녹색 전환 방법이 까마득하고 그 비용도 만만치 않다고 여긴다.

녹색전환 과제를 받아든 기업들 목소리1

녹색전환 과제를 받아든 기업들 목소리2

“녹색 전환, 공감하지만 거대한 장벽으로 다가와”
삼성전자 협력사로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특수가스를 공급하는 ㄴ사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 회사는 두 해 전 삼성전자로부터 ‘스코프3 기준 탄소배출량’ 측정 결과를 요구받았다. 제품 생산 과정외에 물류 과정이나 협력사에서 발생하는 탄소배출량 감축 계획 등을 담아야 하는 지속가능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2008년부터 해당 보고서를 작성한 삼성전자가 스코프3 기준 배출량을 담기 시작한 건 2023년 발간분부터다. ㄴ사 쪽은 “2022년부터 분위기가 달라져 삼성전자에서 직접 교육하고 있다. 월간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지속가능보고서 120페이지에 담긴 스코프3 기준 탄소배출량 항목 중 ‘구매한 제품&서비스’(1만4596천톤CO2-eq)에 ㄴ사 탄소배출량도 포함돼 있다.

소형 마이크와 스피커를 미국에 납품하는 ㄷ사는 ‘지에이치지(GHG, Greenhouse Gas) 프로토콜’ 이행을 요구받았다. 국제적으로 인정된 온실가스 측정법에 따른 회계처리와 보고 기준을 따르라는 뜻이다. 반도체나 디스플레이, 스마트폰 등에 들어가는 접합소재 제조기업 ㄹ사는 저탄소 제품 납품 압박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이 회사 관계자는 “생산 전반의 혁신과 기술 개발이 필요한 일이다보니 시간과 돈이 든다. 납품 계약 협상 때마다 불안하다”고 했다.

규제가 다양하다는 점도 부담이다. 경기도 내 공장이 위치한 화장품 제조 기업도 점점 늘어나고 있는 규제들을 모니터링하고 준수하는 체계를 만드는 데 어려움이 많다고 했다. 애로사항을 소개해달라는 한겨레의 서면 질의에서, 이 업체 담당자는 과대포장 규제, 생산자책임재활용(EPR) 제도 도입, 재생원료 의무화, 분리선별을 용이하기 위한 재질 표기 등으로 다양하다고 답했다. “국가별 대상 제품이나 정책의 내용, 시기 등이 다 달라 관련 정보가 부족하고, 또 대체 소재 등을 제품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많은 연구와 테스트가 필요하지만 기술 개발을 할 역량이 부족하다. 게다가 재생·바이오 소재는 기존 소재보다 20% 이상 비싸고 친환경 인증 비용도 더 든다”고 말했다.

물론 이들 기업들도 이런 변화가 불가피하다고 여긴다. 반도체 검사장비 수출기업인 ㅁ사의 한 담당자는 “(거래선의 녹색 전환 요구는) 하나로 꼽을 수 없다. 다양하고 복잡하다”며 “하지만 이런 요구는 얼라이언스(동맹) 형태로 작동된다. 미국과 유럽 고객사들은 거의 다 동맹에 들어가있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요구는 매년 업데이트 된다”고 했다. 시간과 돈이 드는 일이지만 피하거나 늦췄다간 거래선이 끊기는 등 생존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결국 돈과 시간의 문제…녹록지 않은 현실
하지만 중견·중소기업에서 ‘환경’ 관련 업무 전담 인력을 두는 것은 현실적으로 벅차다. 2020~2021년 세계적으로 탄소중립 선언이 잇따르고 관련 규제가 강화된 뒤, 환경 또는 이에스지(ESG·환경사회지배구조) 업무 담당 인력을 대거 채용한 대기업과는 사정이 딴판이다. 중견·중소기업에서 이런 업무는 그 중요도와 무관하게 대외협력팀이나 총무팀, 영업팀의 가욋일로 할당돼 있는 게 태반이다. 이런 까닭에 실제 업무는 외부에 맡기는 경우도 적지 않다.

직원 수가 20명 남짓인 ㅂ사는 거래업체로부터 요구받은 지속가능경영 보고서 작성을 외부 컨설팅 업체에 맡겼다. 수백만원의 비용을 들여야 했다. 이 회사의 김아무개 총무부장은 맡을 사람이 없다고 했다. “팀원이 딱 2명이에요. 지속가능경영 보고서를 이해하고 작성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봤어요.” 그는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지원 사업을 발품 팔아 찾아다녔다. “여러 회사에서 ‘어느 기관에서 지원받을 수 있나’ ‘지원 신청은 어떻게 하나’란 문의를 많이 받았어요. 정부나 공공기관이 녹색 전환 대응과 관련한 설명회를 많이 열면 좋겠어요.”

대기업의 ‘상생 프로그램’ 도움을 받는 길도 있다. 삼성전자와 에스케이(SK)하이닉스, 현대자동차 등은 1차 협력사를 중심으로 중소기업 대상 상생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녹색 전환 관련 대응 외에도 원자재 책임성 관리, 기술 혁신 지원, 윤리 등으로 꾸려진 프로그램이다. 중소기업으로선 자문을 얻을 수 있는 이점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또 다른 형태의 ‘대기업 종속’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원청업체에 원가 구조와 밀접한 경영과 생산 관련 각종 정보를 제공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이닉스의 상생 프로그램을 이용한 한 업체 담당자는 “협력사 상황을 평가하고 부족한 부분을 지원하려는 취지이긴 하지만 정보는 정보대로 제공하고 기준을 맞추지 못하면 ‘부적합’으로 분류된다”고 했다. 또 다른 중소기업의 담당자는 “협력사 평가가 최근 들어 부쩍 강해지고 있다”며 “대기업의 지원 프로그램을 이용하자니 강화된 평가를 받으면서 자율성은 줄어드는 딜레마가 있다”고 말했다.

RE100…기업 혼자선 미션임파서블

기업 스스로 할 수 없는 ‘절대 과제’도 있다. 바로 생산활동에 필요한 전기를 모두 재생에너지로 충당하자는 알이100이 여기에 해당한다. 국내엔 산업 전력 수요를 대체할 정도의 재생에너지가 없는 탓이다. 정부는 재생에너지 대신 원전도 인정해주자는 ‘무탄소에너지(CFE) 이니셔티브’를 추진해 기업의 부담을 덜어주겠다고 하지만, 이미 애플·구글·나이키·3M 등 글로벌 기업들을 중심으로 공급망에 알이100을 인증하라는 요구 등은 거스를 수 없는 과제로 다가온 상황이다.

반도체 검사장비 업체 ㅁ사는 자체 전력 수급으로 알이100 달성이 불가능하다는 평가를 내린 뒤 머리만 싸매고 있다. 이 회사 관계자는 “정부와 지자체의 재생에너지 관련 정책이 모호하고 신뢰하기도 어렵다”며 “(재생에너지 공급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산업단지에 들어가고 싶지만 정작 산업단지 조성은 공회전 중”이라고 말했다. 물론 중소기업 스스로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는 방식으로 재생에너지 활용을 높일 수는 있다. 여기에도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이 아쉽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고 싶어도 건물주가 부정적이어서 애를 먹고 있어요. (태양광 패널을 설치한) 건물주에게 세제 혜택과 같은 인센티브를 강화하면 좋겠습니다.” ㅂ사의 김 총무부장은 답답함을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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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환경과 경제산업 뉴스를 씁니다. 책 <지구를 쓰다가>, <달콤한 나의 도시양봉>을 썼습니다. ecowoori@hani.c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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